
35년의 짧은 생애 동안 불멸의 작품을 남긴 천재의 발자취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서 탄생했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의 부악장이자 바이올린 교사였으며, 어머니는 안나 마리아 페르틀이었습니다. 볼프강은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누나 마리아 안나(난네를)와 함께 단 두 명만이 유아기를 넘어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으며 라틴어 이름 테오필루스를 받았는데, 이는 후에 그리스어 아마데우스로 사용되었습니다.
1761년 1월, 불과 5세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음악 역사에 남을 첫 작곡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최초 작품은 건반악기를 위한 짧은 소품인 안단테 K.1a와 알레그로 K.1b였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의 이 작품들을 자신의 음악 노트에 세심하게 기록하며 "볼프강 모차르트가 1761년 1월, 5세가 되기 한 달 전에 작곡함"이라고 명시했습니다. 당시 모차르트는 누나 난네를과 함께 아버지에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클라비어 연주를 배운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작곡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그의 천부적 재능을 증명합니다. 이 최초의 작곡은 향후 600여 개의 걸작을 탄생시킬 천재 작곡가의 출발점이자, 음악 신동 모차르트의 전설적 경력이 시작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1762년 1월, 6살의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 누나 난네를과 함께 뮌헨을 방문했습니다.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궁정 연주를 펼쳤으며, 이는 모차르트의 첫 번째 주요 연주 여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선제후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어린 신동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성공적인 연주는 이후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대규모 연주 여행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6세의 볼프강과 11세의 누나 난네를이 빈으로 여행하여 황실에서 연주했습니다. 쇤브룬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와 프란츠 1세 황제 앞에서 연주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어린 모차르트는 궁전의 마룻바닥에서 미끄러졌는데, 당시 7세였던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가 그를 일으켜 주었고, 모차르트는 "커서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천재 소년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황실에 처음 선보인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들 볼프강(당시 7세)과 딸 마리아 안나('난네를', 당시 11세)의 재능을 유럽 전역에 알리기 위해 1763년 6월 9일 잘츠부르크를 출발하여 약 3년 반에 걸친 대규모 유럽 순회공연을 시작했습니다. 이 여행은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브뤼셀,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헤이그 등 유럽의 주요 궁정과 도시를 순회하며 진행되었습니다. 어린 모차르트 남매는 각지에서 왕족과 귀족들 앞에서 연주하며 "신동"으로 찬사를 받았고, 특히 파리와 런던에서는 수개월간 체류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여행은 모차르트에게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과 작곡 기법을 접할 수 있는 결정적인 교육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8세의 모차르트는 런던에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를 만나게 됩니다. J.C. 바흐는 모차르트에게 갈랑 양식의 우아하고 선율적인 작곡 기법을 가르쳤으며, 그의 명쾌하고 서정적인 음악 스타일은 어린 모차르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런던 체류 중 모차르트는 자신의 첫 교향곡인 교향곡 1번 K.16을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은 J.C. 바흐의 영향을 명확히 보여주며, 3악장 구성의 이탈리아 신포니아 형식을 따릅니다. J.C. 바흐와의 만남은 모차르트의 음악적 발전에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1763년 6월부터 시작된 약 3년 반에 걸친 유럽 대여행이 종료되었습니다. 모차르트 가족은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 브뤼셀,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등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볼프강과 난네를의 천재성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파리와 런던에서는 왕실과 귀족들 앞에서 연주하며 큰 찬사를 받았으며, 볼프강은 이 기간 동안 다양한 음악적 영향을 받고 작곡 실력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긴 여행을 마치고 가족은 잘츠부르크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모차르트 가족은 1767년 9월 빈으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를 빈에서 초연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11세였던 모차르트는 오페라 부파 《가장된 바보 아가씨 La finta semplice》 K.51을 작곡했으나, 안타깝게도 빈 극장 측의 반대와 음모로 인해 초연이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이 시기에 징슈필 《바스티앵과 바스티엔느 Bastien und Bastienne》 K.50도 작곡하여 빈 메스머 박사의 저택에서 초연했습니다. 이 여행은 모차르트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빈 음악계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차르트는 13세가 되던 1769년 12월, 아버지 레오폴트와 함께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행은 약 15개월간 지속되었으며, 이탈리아의 주요 음악 도시들인 베로나, 만투아, 밀라노, 볼로냐, 피렌체, 로마, 나폴리 등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이탈리아 음악계의 거장들을 만나고 각지에서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특히 밀라노에서는 오페라 《미트리다테, 폰토의 왕》(K. 87) 작곡 의뢰를 받아 성공적으로 초연하였습니다. 또한 볼로냐에서는 저명한 음악 이론가 파드레 마르티니에게 대위법을 배웠고, 로마에서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한 번 듣고 완벽하게 기억해 악보로 옮기는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여행은 모차르트가 이탈리아 음악 양식을 깊이 이해하고 작곡가로서 더욱 성숙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770년 4월 11일, 14세의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 중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가 작곡한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Miserere mei, Deus)》를 들었습니다. 이 곡은 바티칸이 악보 공개를 금지하고 엄격히 관리하던 작품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복잡한 9성부 합창곡을 단 한 번 듣고 숙소로 돌아가 기억만으로 악보를 완벽히 재현해냈습니다. 머칠 후 다시 한 번 들은 뒤 몇 가지 세부사항을 수정하여 완벽한 악보를 완성했습니다. 이 놀라운 음악적 재능은 유럽 전역에 알려지면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전설적인 일화가 되었습니다.
1770년 10월 9일, 모차르트는 14세의 어린 나이로 볼로냐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회원으로 승인되었습니다. 이 아카데미는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기관 중 하나로, 당시 모차르트가 받은 이 인정은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여름 동안 파드레 지암바티스타 마르티니로부터 대위법을 배웠으며, 엄격한 시험을 거쳐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회원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음악계가 모차르트의 뛰어난 재능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1771년 8월부터 12월까지 레오폴트와 볼프강은 밀라노를 다시 방문하여 세레나타로 발전한 전막 오페라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 K.111을 작곡하고 초연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페르디난트 대공과 모데나의 베아트리체 공주의 결혼식을 위해 의뢰받은 것으로, 1771년 10월 17일 밀라노 테아트로 레지오 두칼레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어 72세의 하세의 오페라를 압도하였고, 레오폴트는 "대공이 최근 2부를 주문했다"며 "모든 귀족들과 사람들이 거리에서 끊임없이 볼프강을 축하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여행 중 모차르트는 교향곡 F장조 K.112 (제13번)도 작곡하였습니다.
레오폴트와 볼프강은 1772년 10월 밀라노로 돌아가 카니발 오페라 《루치오 실라》 K.135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볼프강은 신속하게 작곡했으나, 주요 가수들의 늦은 도착과 수석 테너의 불참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12월 26일 초연은 페르디난트 대공의 지각으로 두 시간 지연되었고, 출연진 간의 다툼과 발레 삽입으로 공연이 새벽 2시를 넘겨 끝나는 등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후 공연들은 호평을 받아 총 26회나 상연되었고, 경쟁작인 파이지엘로의 오페라 초연이 연기될 정도였습니다. 레오폴트는 토스카나 대공에게 아들의 임명을 요청했으나, 피르미안 백작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거부당했습니다. 이탈리아 임명의 희망이 좌절된 모차르트 부자는 1773년 3월 밀라노를 떠났고, 두 사람 모두 다시는 이탈리아를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1773년 3월, 모차르트는 세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17세의 모차르트는 대주교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 밑에서 궁정 음악가로 일하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피아노 협주곡 5번 D장조 K.175, 그리고 여러 세레나데와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했습니다. 특히 교향곡 25번은 질풍노도 양식의 영향을 받은 극적이고 열정적인 작품으로, 모차르트의 성숙한 작곡 기법을 보여줍니다.
K.175 피아노 협주곡 제5번 D장조는 1773년 17세의 모차르트가 작곡한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입니다. 이전 작품들은 다른 작곡가의 편곡이었지만, K.175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차르트의 창작물입니다. 트럼펫과 팀파니를 포함한 화려한 편성으로 축제적 분위기를 표현하며, 독립적인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모차르트의 초기 교향곡 중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인 교향곡 제29번 A장조 K.201을 완성하였습니다. Stanley Sadie는 이 작품을 "개인적이고 친밀한 실내악 스타일과 여전히 격렬하고 충동적인 방식의 독창적인 결합"이라고 평가하며 "이정표적 작품"이라 칭했습니다. 이 교향곡은 제25번과 함께 모차르트 초기 교향곡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18세 모차르트의 성숙한 작곡 능력을 보여주는 랜드마크적 작품입니다. 2개의 오보에, 2개의 호른, 현악기로 편성된 전형적인 초기 교향곡 형식을 따르면서도, 우아한 주제와 야심찬 호른 파트, 소나타 형식의 세련된 구조를 통해 고전주의 교향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1775년, 19세의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악단 콘체르트마스터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연주를 위해 바이올린 협주곡 5곡을 집중적으로 작곡했습니다. 제1번 K.207부터 제5번 "터키풍" K.219까지, 특히 마지막 네 곡은 1775년 한 해에 연달아 완성되어 그의 놀라운 창작력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들은 이탈리아 여행의 영향과 독일 전통이 조화를 이루며, 모차르트 특유의 우아함과 깊이를 담고 있습니다. 제5번은 마지막 악장의 이국적인 터키풍 선율로 특히 유명합니다. 이 다섯 곡은 오늘날까지 가장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1777년 9월 23일, 21세의 모차르트는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함께 새로운 직책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잘츠부르크 궁정에서의 낮은 보수와 오페라 기회 부족에 좌절한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갈등 끝에 사직했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21세인 아들의 판단력을 신뢰하지 않아 단독 여행을 허락하지 않았고, 가족의 재정 사정으로 자신은 잘츠부르크에 남아 급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동행시켰습니다. 이 여행은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을 거쳐 파리로 이어지는 16개월간의 힘든 여정이 될 것이었습니다.

1777년 10월 30일, 모차르트는 어머니와 함께 만하임에 도착하여 약 4개월간 체류했습니다. 궁정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음악가 베버 가족을 만나 17세의 소프라노 알로이지아 베버에게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녀를 위해 "Non sò, d'onde viene" K.294 등 여러 아리아를 작곡했습니다. 이 시기에 플루트 협주곡 1번 K.313과 2번 K.314를 작곡했으며, 만하임 악파의 혁신적인 관현악법(크레센도, 트레몰로 등)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이 베버 가족과 가까워지며 파리행을 미루는 것을 강하게 질책했고, 결국 모차르트는 1778년 3월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1778년 6월 18일, 모차르트의 교향곡 31번 《파리》 K.297이 파리의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공개 초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22세였던 모차르트가 구직을 위해 파리에 체류하던 중 프랑스 청중의 취향에 맞추어 작곡한 교향곡입니다. 튈르리 궁전의 살 데 스위스 홀에서 열린 초연에서 청중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특히 프랑스식 "프르미에 쿠 다르셰"(첫 활 긋기)에 크게 환호했습니다. 이에 앞서 6월 12일에는 지겐탈 백작의 저택에서 비공개 초연이 먼저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1777년 모차르트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 파리를 여행할 때 어머니가 동행했습니다. 파리에서 안나 마리아는 갑작스러운 원인 미상의 질병으로 쓰러졌습니다. 14일간 병을 앓으며 열, 설사, 두통에 시달렸고, 환각 증세를 보였으며 말을 거의 할 수 없었고 청력을 잃어 "소리를 질러야 들을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월 30일 종부성사를 받았고, 1778년 7월 3일 저녁 파리의 소박한 숙소(rue du Sentier 8번지)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생테스타슈 성당(Saint-Eustache)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정확한 묘지 위치는 현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어머니의 죽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이 시기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8번 a단조 K.310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비극적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1779년 1월 17일,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에 의해 잘츠부르크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파리에서의 실망스러운 경험과 어머니의 사망 이후 마지못해 귀향한 그에게 주어진 새 직책이었습니다. 콘체르트마이스터에 더해 궁정 오르가니스트 임무를 수행하며 연봉 450굴덴을 받았지만, 예배당 연주와 방대한 교회 음악 작곡 의무가 따랐습니다. 23세의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단순히 "직원"으로 취급받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고, 그를 묶어둘 이유도 희망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C장조 미사 "대관식" K.317, 세레나데 "포스트호른" K.320, 징슈필 "차이데" K.344 등 다양한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1781년 3월,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의 명령으로 빈으로 소환되었습니다. 대주교는 요제프 2세 황제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빈을 방문했고, 모차르트를 수행원으로 동행시켰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빈의 귀족 사교계에서 자신의 재능을 선보일 기회를 제한받았습니다. 대주교는 모차르트가 개인적인 연주회를 통해 수입을 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하인들과 함께 식사하도록 요구하는 등 그를 단순한 고용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러한 모욕적인 대우는 모차르트의 독립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고, 결국 대주교와의 결별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781년 5월, 모차르트와 콜로레도 대주교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습니다. 대주교는 모차르트를 단순한 하인처럼 대하며 빈에서의 독립적인 음악 활동을 모두 금지했습니다. 5월 9일 모차르트가 사직서를 제출하자 대주교는 이를 거부하며 "악당", "무례한 놈"이라고 모욕했습니다. 6월 8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모차르트가 대주교의 비서관 아르코 백작에게 정식 사직서를 제출하려 하자, 백작은 그를 문 밖으로 떠밀며 엉덩이를 발로 찼습니다. 이 굴욕적인 사건은 모차르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사건 이후 모차르트는 빈에서 프리랜서 음악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귀족의 하인이 아닌 독립적인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경제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자유를 얻어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같은 걸작들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모차르트의 징슈필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K.384가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요제프 2세 황제가 독일어 오페라 진흥을 위해 추진한 국민징슈필 프로젝트의 대표작으로, 모차르트가 직접 지휘대에 올랐습니다. 주요 출연진으로는 벨몬테 역의 발렌틴 아담버거, 콘스탄체 역의 카테리나 카발리에리, 오스민 역의 루트비히 피셔 등이 참여했습니다.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어 처음 두 공연에서만 1,200플로린의 수익을 올렸으며, 이후 독일어권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초연을 관람한 요제프 2세가 "음표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자, 모차르트는 "필요한 만큼만 있습니다"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 성공으로 모차르트는 빈에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했습니다.

1782년 8월 4일, 모차르트는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하였습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만하임에서 사랑했던 알로이지아 베버의 여동생이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하였으며, 결혼식 당일까지도 동의서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결혼 승낙서는 결혼식 다음날에야 도착하였습니다. 콘스탄체는 음악적 재능은 부족하였지만, 모차르트의 평생 동반자가 되어 6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중 겨우 두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사후 콘스탄체는 남편의 작품을 보존하고 출판하는 데 헌신하였으며, 1809년 덴마크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니센과 재혼하였습니다.
1784년 2월 9일, 모차르트는 "Verzeichnüß aller meiner Werke"(나의 모든 작품 목록)라는 제목의 자필 작품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목록의 첫 번째 작품은 피아노 협주곡 14번 E플랫 장조 K.449로,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난 1791년까지 작곡한 모든 작품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모차르트의 후기 작품들의 정확한 작곡 시기를 파악하는 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1차 자료로서, 음악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1784년 12월 14일, 모차르트는 빈의 프리메이슨 롯지 "자선(Zur Wohltätigkeit)"에 입회했습니다. 계몽주의 이상을 추구하는 지식인 모임이었던 프리메이슨에 친구들과 후원자의 영향으로 가입했으며, 1785년 4월 장인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아버지 레오폴트도 같은 해 입회시켰습니다. 모차르트는 칸타타 "프리메이슨의 기쁨" K.471, "장례음악" K.477 등 다수의 프리메이슨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1791)는 프리메이슨의 상징주의와 철학이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입니다. 그는 사망 몇 주 전까지도 프리메이슨 칸타타를 작곡하며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신념을 지켰습니다.
1784년부터 1786년까지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14번(K.449)부터 19번(K.459)까지 6곡의 걸작을 연이어 작곡하며 '협주곡의 황금기'를 열었습니다. 빈에 정착한 모차르트는 이 시기 귀족과 부유층을 위한 예약 연주회(Subskriptionskonzert)를 정기적으로 개최했으며,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지휘하는 협주곡 공연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협주곡들은 독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간의 대화적 구조, 풍부한 관현악법, 그리고 비르투오소적 기교와 서정성의 완벽한 균형을 보여주며 협주곡 장르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16번 K.451과 17번 K.453은 화려한 기교와 깊이 있는 음악성으로 당대 빈 청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모차르트가 요제프 하이든에게 헌정한 6곡의 현악 사중주는 1782년부터 1785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작곡되었습니다. K.387, K.421, K.428, K.458 "사냥", K.464, K.465 "불협화음" 까지 이어지는 이 작품들은 하이든의 Op.33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모차르트는 "긴 고심 끝에 태어난 자식"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785년 출판된 악보에서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자 가장 친애하는 친구"라 부르며, 이 사중주들을 "6명의 자식"에 비유하여 그의 보호 아래 맡긴다는 감동적인 헌사를 남겼습니다. 이 작품들은 고전주의 현악 사중주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K.465는 서주의 대담한 불협화음으로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K.492는 1786년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모차르트의 지휘로 초연되었습니다. 로렌초 다 폰테와의 협업으로 보마르셰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총 4막으로 구성된 이 오페라는 귀족과 하인의 관계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신랄하게 묘사하여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편지의 이중창", "더 이상 날지 못하리" 등의 아리아는 초연 당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이 작품은 모차르트 오페라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의 성공으로 프라하에 초청받은 모차르트는 이 방문을 기념하여 교향곡 38번 D장조 K.504 "프라하"를 작곡했습니다. 1787년 1월 19일 프라하의 슈타베오프스케 극장에서 자신의 지휘로 초연된 이 작품은 3악장 구성에 장엄한 서주로 시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프라하 시민들은 빈보다 더 열광적으로 모차르트를 환영했고, 모차르트는 "나의 프라하 사람들은 나를 이해한다"라며 이 도시에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인연은 후에 《돈 조반니》를 프라하를 위해 작곡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787년 5월 28일,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67세로 별세했습니다. 레오폴트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1756년 출간한 바이올린 주법서는 18세기 음악 교육의 권위 있는 교재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볼프강의 유일한 스승으로서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우는 데 헌신했으며, 유럽 순회 공연을 통해 그 재능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사흘 뒤에야 전해 들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으나, 그는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도 작곡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프라하의 에스타테츠 극장에서 오페라 《돈 조반니》(Il Dissoluto Punito ossia il Don Giovanni) K.527 초연.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으로 작곡된 2막의 드라마 조코소(해학곡). 대본은 1787년 6월에 완성되었으며, 악보는 같은 해 10월 28일에 완성되어 다음 날인 10월 29일 초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돈 후안의 전설을 토대로 한 오페라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787년 12월 7일, 요제프 2세 황제는 모차르트를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 실내악 작곡가(Kammermusicus)로 임명했습니다. 이 직책은 1787년 11월 15일에 사망한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후임 자리였습니다. 모차르트는 연봉 800굴덴을 받았으며, 주요 업무는 빈 궁정의 가면무도회용 춤곡을 작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글루크는 이 직책에서 연봉 2,000굴덴을 받았으나, 모차르트의 급여는 그보다 낮았습니다. 이 임명으로 모차르트는 빈 궁정의 공식적인 작곡가 지위를 얻게 되었으나, 이 직책은 비교적 명예직에 가까웠고 그의 경제적 어려움을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습니다.
모차르트는 1788년 여름, 놀랍게도 단 6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의 마지막 3대 교향곡을 연이어 작곡했습니다. 6월 26일에 39번 교향곡 E♭장조 K.543을 완성한 후, 7월 25일에 가장 유명한 40번 교향곡 g단조 K.550을, 그리고 8월 10일에는 "주피터"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웅장한 41번 교향곡 C장조 K.551을 완성했습니다. 이 세 작품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모차르트 교향곡 예술의 정점을 이루는 걸작들입니다. 39번은 우아하고 서정적이며, 40번은 열정적이고 극적인 감정을 담고 있고, 41번은 대위법적 기교와 웅장함으로 교향곡 장르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줍니다. 흥미롭게도 이 교향곡들이 모차르트 생전에 실제로 연주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작품들은 후대에 고전주의 교향곡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4월 8일부터 6월 4일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프로이센 왕)의 궁정을 방문하기 위한 베를린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행은 빈 궁정의 환대가 식어가던 시기에 새로운 후원자를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여행 중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포츠담을 거쳐 베를린에 도착했으며, 5월 26일 포츠담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앞에서 연주했습니다. 왕은 첼로 애호가였으며, 이를 계기로 모차르트는 왕을 위해 《프로이센 사중주》(K. 575, 589, 590)의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왕비를 위한 6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의뢰받았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3개(K. 576)만 완성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5월 12일 토마스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했으며, 당시 칸토르였던 요한 프리드리히 돌레의 요청으로 바흐의 오르간 앞에서 즉흥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여행에서 기대했던 재정적 성과는 크지 않았지만, 음악적으로는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오페라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 K.588이 빈 부르크테아터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되었습니다. 로렌초 다 폰테가 대본을 작성했으며, 이 작품은 '여자는 다 그래'라는 제목으로 여성의 정절에 관한 철학적 내용을 다룬 오페라 부파입니다. 모차르트의 3대 오페라 걸작 중 하나로, 다 폰테와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협업 작품입니다. 초연은 요제프 2세 황제의 위촉으로 이루어졌으며,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두 쌍의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시험하는 내용으로, 모차르트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과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모차르트의 후원자였던 요제프 2세가 1790년 2월 20일 빈에서 4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계몽주의적 개혁 군주로서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며 예술과 문화를 적극 장려했으며, 특히 모차르트를 궁정 작곡가로 임명하고 오페라 작곡을 지원했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모차르트는 중요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고, 그의 동생인 레오폴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레오폴트 2세는 형과는 달리 예술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이는 모차르트의 궁정 내 입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레오폴트 2세의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 축제를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여행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공식 초청을 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비용을 부담하며 기회를 찾아 떠났습니다. 10월 15일 시립 극장에서 자신의 콘서트를 개최하여 피아노 협주곡 26번 D장조 K.537 '대관식'과 19번 F장조 K.459를 연주했습니다. 이 여행은 재정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대관식 협주곡이라는 걸작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생애 마지막 공개 연주회가 빈의 궁정에서 열렸습니다. 이 연주회에서 그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27번 B-flat장조 K.595를 연주했습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으로, 그의 사망 약 9개월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연주회 당시 모차르트의 건강은 이미 쇠약해진 상태였으며, 같은 해 12월 5일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마지막 협주곡은 우아하고 서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모차르트의 성숙한 음악적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791년 7월, 모차르트는 검은 옷을 입은 익명의 사자로부터 레퀴엠(진혼곡) 작곡 의뢰를 받았습니다. 의뢰인은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Franz von Walsegg, 1763-1827)으로, 1791년 2월 14일 20세의 나이로 사망한 그의 아내 안나(Anna)를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백작은 1792년 2월 14일 아내의 1주기에 이 곡을 연주하려 했습니다. 작곡료는 50두카텐(당시 상당한 금액)이 제시되었으며, 모차르트는 선금으로 절반을 받았습니다. 이 의뢰는 모차르트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으며, 그는 같은 해 12월 5일 레퀴엠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술피리》 (Die Zauberflöte) K.620이 빈의 프라이하우스 극장(Theater auf der Wieden)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이자 가장 위대한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가 대본을 작성하고 극장 지배인으로서 파파게노 역을 직접 맡았습니다. 모차르트가 직접 지휘를 맡았으며, 그의 여동생이었던 요제파 호퍼(Josepha Hofer)가 밤의 여왕 역을 맡았습니다.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어 모차르트 생전에 100회 이상 공연되었고, 그의 사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작품은 독일어 징슈필(Singspiel) 형식으로 작곡되었으며, 프리메이슨 사상과 계몽주의 이념이 담겨 있습니다.
<마술피리> 는 1791년 9월 30일 빈의 비덴 극장에서 모차르트의 지휘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0월 한 달간만 20회 이상 공연되며 매회 매진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기록이었습니다. 파파게노 역의 시카네더와 밤의 여왕 아리아 "복수의 마음이 불타오르네"는 특히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모차르트는 "극장이 늘 가득 차 있다"며 만족감을 표현했고, 이 성공은 그에게 경제적 안정과 예술적 인정을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마술피리>는 모차르트 생전에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오페라로 기록되었습니다.
모차르트는 1791년 10월부터 레퀴엠 작곡 작업에 몰두하던 중, 11월 20일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모차르트는 레퀴엠과 칸타타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11월 15일까지 칸타타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질병이 악화되면서 더 이상 작곡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침대에서 요양하며 레퀴엠의 완성을 염원하였습니다.

향년 35세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 모차르트는 빈 라우엔슈타인가세 자택에서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해 11월 20일부터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미완의 레퀴엠(K.626)을 완성하려 애썼습니다. 의뢰받은 이 작품은 결국 그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되었고, 제자 쥐스마이어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장례는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판 슈비텐 남작이 준비했으며, 12월 7일 성 마르크스 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빈민 묘지에 묻혔다는 통념과 달리, "공동 묘지"는 일반 시민을 위한 개인 묘지로 당시 비엔나의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모차르트 자신이 복잡한 장례 의식을 싫어했기에 간소한 방식이 선택되었습니다. 살리에리, 쥐스마이어 등 소수의 음악가들이 참석했으며, 폭풍우 속 장례식 이야기는 실제 기상 기록과 맞지 않는 낭만적 과장으로 밝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