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설명
총 10악장, 약 46분 한 호흡으로 풀린 칸타타입니다. 합창 5곡(1·2·4·7·10번), 아리아 3곡(3·6·8번), 듀엣 1곡(5번), 삼중창 1곡(9번)이 사순절 자선 연주회 한 자리에 맞춰 짜여 있고, 다윗왕이 시편으로 회개하고 다시 신에게 의지하는 흐름이 한 작품의 호흡을 이룹니다. 음악의 80% 가량은 모차르트가 1782~83년 빈에서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기념하며 적다 멈춘 〈C단조 미사〉 K.427에서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 1악장 〈Alzai le flebili voci〉는 미사 첫 Kyrie의 코러스 동기를, 2악장 〈Cantiam le glorie〉는 Gloria의 합창을, 4·7·10번 합창은 Gratias·Qui tollis·Cum sancto Spiritu에서 각각 옮겨 둔 자리입니다. 모차르트가 사베리오 마테이의 시편 의역에 맞춰 가사만 새로 갈아 끼우고, 합창과 솔로 짜임새의 큰 구조를 그대로 두었다는 점이 작품의 한 핵심입니다. 새로 적힌 음악은 단 세 자리 — No. 6 테너 아리아 〈A te, fra tanti affanni〉, No. 8 소프라노 아리아 〈Fra l'oscure ombre funeste〉, 그리고 마지막 No. 10 합창 〈Chi in Dio sol spera〉의 솔로 사중창 카덴차입니다. 두 신곡 아리아는 1785년 빈의 무대 가수 — Caterina Cavalieri와 Valentin Adamberger — 의 목소리에 맞춰 새로 적힌 자리로, 같은 두 가수가 3년 전 〈후궁으로부터의 도주〉(K.384)에서 콘스탄체와 벨몬테 역을 맡았던 인연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악기 편성은 미사 K.427과 거의 같습니다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2, 트롬본 3, 팀파니, 현5부. 트롬본 3대가 합창의 알토·테너·베이스 성부를 그대로 따라 부르며 합창의 윤곽을 단단히 받쳐 두는 1780년대 빈 종교음악의 표준 자리를 이 작품도 따릅니다. 자필악보는 베를린 국립도서관(Staatsbibliothek zu Berlin) Mus.ms.autogr. Mozart, W. A. 469에 보관되어 있으며, 끝면에 “1785년 3월 6일”이라는 작곡 마감일이 모차르트 본인의 손으로 적혀 있습니다. 초판은 모차르트 사후 약 100년이 지난 1882년, 라이프치히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에서 필립 슈피타(Philipp Spitta)가 편집한 모차르트 전집(Serie IV: Cantaten und Oratorien, Bd. 2, Nr. 5)에 실렸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1785년 2월의 빈, 모차르트는 손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들고 있었습니다 — 한쪽에는 사순절 동안 자신의 콘서트를 위해 새로 적어 둔 피아노 협주곡 K.466·K.467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빈 음악가협회(Wiener Tonkünstler-Societät)의 사순절 자선 연주회를 위해 새 작품을 한 곡 풀어 내야 한다는 부탁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음악가협회는 1771년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Gassmann)이 창설한 단체로, 회원 작곡가들의 미망인과 자녀에게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매년 사순절 두 차례 빈 부르크테아터에서 자선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 모차르트 본인도 콘스탄체와 결혼한 직후인 1785년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을 시도했으나(서류 누락으로 결국 가입되지 못했지만), 이 칸타타가 그 가입 시도의 한 자락에 놓인 작품입니다. 새 작품을 처음부터 적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모차르트는 책상 서랍을 한 번 더 열어 봤습니다 — 거기에는 1782~83년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신께 감사드리며 적다 멈춘 〈C단조 미사〉 K.427의 자필이 펼쳐진 채로 그대로 있었습니다. 미사로서는 Kyrie·Gloria·Sanctus·Benedictus까지만 적혔고 Credo·Agnus Dei가 비어 있던 그 작품 — 모차르트가 결혼 직후 잘츠부르크에서 콘스탄체에게 직접 들려주려고 적었지만 끝내 한 호흡으로 닫지 못한 그 미사 — 의 거의 모든 합창과 솔로 자리가 본 작품의 1·2·4·5·7·9·10번 자리로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닫히지 못한 미사가 다른 가사를 입고 한 작품으로 풀려나간 셈입니다. 가사 작가에 대해서는 약 200년 가까이 한 가닥의 오해가 이어졌습니다. 19세기 초 모차르트와 만났던 영국의 음악 출판인 빈센트 노벨로(Vincent Novello)가 콘스탄체와의 인터뷰 메모에 “이 작품의 가사는 로렌초 다 폰테가 적었다”고 옮겨 두었고, 그 한 줄이 19세기 내내 정설로 굳어졌습니다 —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코지 판 투테〉의 그 다 폰테가 본 작품의 가사도 적었으리라는 가설이 19세기 모차르트 전기 곳곳에 옮겨 갔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학자들이 이탈리아 나폴리의 법학자·시인 사베리오 마테이(Saverio Mattei, 1742~95)가 1766~74년에 펴낸 〈시편 의역(I libri poetici della Bibbia)〉의 본문이 그대로 본 작품의 가사임이 확인됐고, 그 결과 모차르트와 다 폰테의 첫 협업은 본 작품이 아니라 1년 뒤 〈피가로의 결혼〉(1786)으로 정리되었습니다 — 책상 위의 한 가닥 메모가 200년 가까이 작품의 출처를 뒤바꿔 두었던 셈입니다. 초연은 1785년 3월 13일과 15일 빈 부르크테아터에서 두 차례 — 사순절 자선 연주회의 정규 일정으로 — 열렸습니다. 솔리스트는 카테리나 카발리에리(Caterina Cavalieri, 소프라노 I), 마리아 만디니(Maria Mandini, 소프라노 II), 발렌틴 아담베르거(Valentin Adamberger, 테너)였고, 카발리에리와 아담베르거는 3년 전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도주〉(K.384) 초연에서 콘스탄체와 벨몬테 역을 맡았던 두 가수였습니다. 새로 적힌 두 아리아 — 카발리에리를 위한 No. 8 〈Fra l'oscure ombre funeste〉와 아담베르거를 위한 No. 6 〈A te, fra tanti affanni〉 — 는 본 작품 안에서 두 가수가 자신의 목소리에 가장 잘 맞는 음역과 기교를 한 번 더 펼쳐 보이는 자리로 짜였습니다. 두 자선 연주는 좌석이 매진되었고, 빈 음악가협회는 본 작품으로 그 해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두어 회원 미망인·자녀들에게 연금을 보탤 수 있었습니다 — 닫히지 못한 미사가 빈의 어느 미망인의 부엌으로 한 호흡 흘러 들어간 셈입니다. 본 작품이 한 흥미로운 사실이 한 자락 더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본 작품을 풀어 두고 나서도 〈C단조 미사〉 K.427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 Credo와 Agnus Dei 자리는 끝내 비어 둔 채 모차르트가 1791년 빈에서 떠났고, 그 결과 오늘날 K.427은 자필악보 기준 4분의 3 분량의 단편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본 작품 K.469가 그 미사의 본 모습이 어땠을지를 한 번 풀어 두는 거의 유일한 흔적이 되는 셈입니다 — 작품의 가사가 시편이 아닌 미사 텍스트였다면, 합창과 솔로의 음악이 그대로 어떤 자리에 놓였을지 — 그 본래 자리의 그림자가 본 작품의 합창 곳곳에 한 호흡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